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주 월성 (문단 편집) == 주요 건축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gyeongju_old.jpg|width=100%]]}}} || || {{{#fbe673 '''신라시대 서라벌 시가지의 모형'''}}} || 위 이미지는 월성과 서라벌의 모습을 재현한 모형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월성 발굴이 아직 시작되기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서 월성 건물 배치는 뚜렷한 근거가 없는 상상일 뿐이다. 또한 앞으로 서라벌 시대의 층까지 발굴조사를 통하여 내려가서 배치를 알아내려면 최대 몇년은 걸릴 것이다. 오른쪽 중간쯤에 [[황룡사]]가 보인다. [[월정교]]와 [[일정교]], [[안압지]] 호수 등은 [[남북국시대]]가 돼야 생겨서 여기에는 없다.[* 단, 안압지와 붙어 있던 임해전 건물은 보인다.] 참고로 월성 남쪽에 있는 절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6989|인용사]]다. 월성 북쪽으로 큰 도로가 있고, 그 끝에 보이는 건물은 또 다른 신라의 궁궐터로 추정되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2896|전랑지]](대궁지)다. 정확한 이름은 불명.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북궁]]이 전랑지라는 설도 있고 [[성덕왕]]대 창건된 [[신궁]] 터, 국가의 중요한 제례를 행하는 건물인 명당 등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2023년 현재 아직 전랑지 전체를 제대로 발굴 조사 한 적이 없어서 정확히 어떤 건물이었는지 추정하기 힘들다. 전랑지는 개발만 막고 그냥 공터로 남겨두었다. [[삼국사기]] 등 사서에는 왕궁 내 각 건축물의 이름들이 전한다. 숭례전ㆍ강무전ㆍ명학루ㆍ월정당ㆍ월상루ㆍ망은루 등 건물과 임해문ㆍ인화문ㆍ무평문ㆍ현덕문ㆍ귀정문ㆍ준례문ㆍ적문 등 출입문이 있었다. 이 중 중심이 되는 정전의 이름은 [[삼국유사]]에서 [[법흥왕]]이 즉위했다는 자극지전(紫極之殿)이나, 여러 기사에서 이름이 나오는 조원전(朝元殿)이라고 추정한다. 숭례전은 [[중국]], [[일본]] 등 [[외국]] [[사신(외교)|사신]]을 접견하고 연회를 여는 장소로 썼다. 그 외 요석궁, 고루 등 명칭이 사서에 나온다. 2000년대 후반 들어서 진보한 레이더 관측으로 지하에 묻힌 유적을 탐사했는데, 위 상상도 같은 당초의 예상과 달리 월성 위 각 건물의 배치가 그리 바둑판식으로 반듯하지는 않았다. 남북 방향을 기본으로 하지만 둥글게 기울어진 초승달 모양인 월성 언덕 자연 지세에 맞춰서 전각을 배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예상 외로 건물들이 촘촘하고 정렬하게 배치되었다. 성 북쪽 남북대로와 바로 연결되는 북3문과 [[임해전]]으로 연결되는 동1문 사이에 대형 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정무와 관련된 중심 건축물, 위에서 언급한 조원전이라고 추정하였으나 사실은 대형 건물이 아니라 여러 작은 건물들이 모인 건물지였고 이 건물지의 중심 건물은 크기가 세로 2칸, 가로 28미터로 [[조선]]/[[대한제국]]의 [[덕수궁 중화전]]보다도 작았다. 그리고 여기는 생뚱맞게도 정사각형 건물 2채가 서로 같은 각도로 삐뚤어졌는데 이 중 하나는 28미터 건물을 둘러싼 담장 동쪽을 잡아먹는 위치에 배치되었다. 서남쪽 끝에는 대형 건물들이 'ㅁ'자 모양으로 배치되었고 이 건물들이 월성에서 가장 커다란 건물을 둘러싸는데, [[사기(역사책)|사기]] 천궁서(天宮書)에 나타나는 궁궐 배치 원리 오성좌를 감안하면 이 곳이 신라 임금이 지내는 침전 혹은 내전이라고 추측한다. 혹은 왕궁 내 사찰 건축물일 가능성도 있다. 중앙에서 약간 서쪽의 북1문과 북2문 사이에는 작은 인공 연못과 여러 중간 규모의 전각이 있어 궁내 의식이나 연회와 관련 있는 장소인 듯하다. 동남쪽 끝부분을 월성의 중심부라고 추정하는데 이곳의 중심 건물 역시 세로 23미터, 가로 15미터로 굉장히 작았다. 물론 8개 층 중에서 이제야 1개 층을 조사했을 뿐이니 앞으로도 20~30년은 발굴 조사를 해야 한다. 월성 안에는 여러 건물들의 초석 외에도 지름 40 m 안팎인 [[호수]]와 가마터, 공방, 우물 등 여러 가지 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초석이 땅 위로 돌출된 건물이 발굴됐다. 다른 건물들과는 다르게 아직 완전히 묻히지 않아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https://www.nrich.go.kr/gyeongju/page.do?menuIdx=328|국립문화재연구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